피카소 사망 50주기 그를 다시 돌아보자
아트뉴스에서는 파블로 피카소 사망 50주년을 기념하는 특집 기사를 발행했습니다. 2부에 걸쳐 그의 생애를 회고했는데요. 1부에서는 1890~1920년대, 2부에서는 1920~1970년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2023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으니 이번 기회에 피카소에 대해 한번 더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볼까해요.
1부 1890~1920년대
피카소는 1881년 10월 25일 스페인 남부 도시 말라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풀 네임은 Pablo Ruiz Picasso입니다. 아버지는 미술 교수이자 지역 박물관의 큐레이터였습니다. 조류를 그린 그의 아버지는 비둘기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였기에 피카소는 어릴적부터 비둘기를 많이 그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는 난독증이 있었지만 예술에는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아버지로부터 소묘와 그림에 대한 교육을 받았고 1892년 11세에 예술 학교에 입학할 정도로 능숙해졌다고 합니다. 1895년 아버지가 예술 학교에 자리잡으며 바르셀로나로 이사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입학할 수 있도록 입학위원회를 설득해 14세의 나이로 아카데미에 입학했습니다. 이후 피카소는 1897년 16세의 나이로 마드리드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 학교에 입학하며 마드리드로 갔지만 수업에 참석하는 데 지쳐서 수업을 빼먹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그 시간에 프라도 미술관에 가서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베르미르의 작품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고, 특히 카라바조와 엘 그레코의 작품에 매혹되었다고 합니다.
피카소의 야망은 그를 파리로 이끌었고 1900년에 그의 친구 카를레스 카사게마스와 함께 파리로 두 달 동안 여행했다고 합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파리를 오가다가 1904년 파리에 정착했습니다. 그는 파리에서 시인이자 예술가인 막스 자코브(Max Jacob)를 만났고 그에게서 프랑스어를 배웠습니다. 그는 이 시기에 막스를 통해 조르주 브라크를 만나게 됩니다. 이 시기는 피카소의 작품 역사에 등장하는 중요한 시기 중 하나인 '청색시대'가 시작되는 시기였습니다. 카사게마스의 죽음을 알고 나서 파란색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빨간색과 주황색, 분홍색 등을 주로 사용했던 1904년부터를 '장미시대'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주제는 주로 서커스 공연자들이었습니다. 색채는 명랑한 듯 보이지만 여전히 청색시대의 우울함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브라크와 함께 서커스를 자주 보러 가며 자연스럽게 서커스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고 하네요. 이 시기에 몽마르트의 Bateau-Lavoir 건물에 파리 작업실을 처음으로 마련했고, 그의 최초의 뮤즈라고 기록되어 있는 프랑스 예술가이자 모델인 페르낭드 올리비에(Fernande Olivier)와 만난 시기이기도 합니다. 피카소는 올리비에를 그린 작품을 60여 점 남겼습니다.
1906년 그는 미국 소설가이자 시인, 극작가인 거트루드 스타인을 만나게 됩니다. 스타인은 아방가르드 아트 컬렉터이기도 하고, 피카소는 그의 초상화 작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작업에 많은 고민이 있던 피카소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본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초상화의 포즈를 차용해 오랜 고민 끝에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1907년 피카소는 최초의 입체파 그림으로 알려진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 그렸습니다. 브라크가 몽마르트의 작업실로 방문했고 두 예술가는 함께 큐비즘의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둘은 공동 작업에 전념했고 둘 중 한 명이 서명하지 않으면 완성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의 당시 작품이 누구의 작품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이유도 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1914년까지 피카소와 브라크는 차분한 갈색과 회색 위주의 분석적 입체파에 몰두했습니다. 이후 그들은 합성 큐비즘을 통해 더 밝은 색상을 도입하고 질감을 추가했으며 콜라주 작업도 추가했습니다.
2부 1920~1970년대
1921년 피카소는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변화의 시기를 겪었습니다. 큐비즘에서 벗어나 고전주의와 초현실주의에 몰두했습니다. 1917년 이탈리아를 여행한 후 신고전주의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그의 표현대로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기입니다. 마드리드 학생 시절부터 영향받은 거장들의 작품과 피렌체, 로마를 방문하며 본 바로크 시대의 거장들 그리고 르네상스의 예술가들 작품까지 작업에 흡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무용수인 올가 코클로바와 첫 결혼을 했고 피카소의 뮤즈이자 주제가 되었습니다. 코클로바와의 결혼으로 파리 최고 수준의 사교계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지만 참석하는 것을 싫어해 자주 논쟁을 벌였다고 합니다.
1927년 당시 45세였던 피카소는 17세 모델 마리 테레즈 월터와 결혼하게 외었습니다. 1935년에는 월터와의 관계가 끝났지만 코클로바와는 공식적으로 이혼하지 않았습니다. 월터는 여전히 피카소에게 엄청난 영감을 주었고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인 '거울 앞 소녀(Girl in Front of Mirror), 1932'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매끈하고 발랄한 모습과 대조적으로 거울 속의 어둡고 초라한 모습을 그린 이 작품에 대해 피카소는 MoMA의 창립 이사인 알프레드 바르에게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1932년 10월 피카소는 50세가 되었고 이듬해 열릴 Galerie Georges Petit에서의 회고전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전시회는 대성공이었습니다. 당시 피카소는 이미 멋진 파리지앵 아파트, 운전시가가 운전하는 자동차가 있고 노르망디의 다형 스튜디오를 가질 정도로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가 되었지만 정치와 예술을 혼합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습니다.
피카소의 또 다른 명작으로 불리는 게르니카는 1937년 작업되었습니다. 피카소는 1937년 파리 만국 박람회 참여를 위해 스페인 공화국 정부로 부터 대형 벽화를 의뢰 받았습니다. 작품의 오른쪽에는 불길이 치솟고 중앙에는 부러진 칼이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놓여있고, 군인을 짓 밝고 있는 말이 크게 그려져 있습니다. 왼쪽에는 죽은 아이와 그의 어머니가 있고 머리 위에는 유령 같은 모습의 황소가 있습니다. 피카소는 게르니카의 의미에 대해 논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학자들이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 작품을 해석했죠. 1938년과 1940년 사이 유럽과 미국을 순회했고, 이 작품을 스페인의 민주주의가 회복될 때까지 스페인으로 반환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MoMA에 보관하도록 맡겼다고 합니다. 이후 1975년 프랑코가 세상을 떠난 후 게르니카는 본국 송환이 진행됐고 현재 마드리드의 레이나 소피아 박물관에 소장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그는 전쟁에 대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그린 작품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도자기와 판화 작업을 주로 했습니다. 말년을 프랑스 남주 지역에서 작업했던 그는 사망한 날 새벽 3시까지 그림을 그렸던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1972년 그가 크레용으로 작업한 죽음에 직면한 자화상은 죽음에 가까워졌음을 그가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되게 하는 작품입니다. 끝까지 작업에 열정을 잃지 않고 끊임없는 연구와 시도를 거듭한 그의 업적은 어쩌면 새로움을 찾고 주저 없이 실행하는 그의 에너지에서 나온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기사 링크에서 더 많은 사진과 이야기를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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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사망 50주기 그를 다시 돌아보자
아트뉴스에서는 파블로 피카소 사망 50주년을 기념하는 특집 기사를 발행했습니다. 2부에 걸쳐 그의 생애를 회고했는데요. 1부에서는 1890~1920년대, 2부에서는 1920~1970년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2023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으니 이번 기회에 피카소에 대해 한번 더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볼까해요.
1부 1890~1920년대
피카소는 1881년 10월 25일 스페인 남부 도시 말라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풀 네임은 Pablo Ruiz Picasso입니다. 아버지는 미술 교수이자 지역 박물관의 큐레이터였습니다. 조류를 그린 그의 아버지는 비둘기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였기에 피카소는 어릴적부터 비둘기를 많이 그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는 난독증이 있었지만 예술에는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아버지로부터 소묘와 그림에 대한 교육을 받았고 1892년 11세에 예술 학교에 입학할 정도로 능숙해졌다고 합니다. 1895년 아버지가 예술 학교에 자리잡으며 바르셀로나로 이사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입학할 수 있도록 입학위원회를 설득해 14세의 나이로 아카데미에 입학했습니다. 이후 피카소는 1897년 16세의 나이로 마드리드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 학교에 입학하며 마드리드로 갔지만 수업에 참석하는 데 지쳐서 수업을 빼먹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그 시간에 프라도 미술관에 가서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베르미르의 작품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고, 특히 카라바조와 엘 그레코의 작품에 매혹되었다고 합니다.
피카소의 야망은 그를 파리로 이끌었고 1900년에 그의 친구 카를레스 카사게마스와 함께 파리로 두 달 동안 여행했다고 합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파리를 오가다가 1904년 파리에 정착했습니다. 그는 파리에서 시인이자 예술가인 막스 자코브(Max Jacob)를 만났고 그에게서 프랑스어를 배웠습니다. 그는 이 시기에 막스를 통해 조르주 브라크를 만나게 됩니다. 이 시기는 피카소의 작품 역사에 등장하는 중요한 시기 중 하나인 '청색시대'가 시작되는 시기였습니다. 카사게마스의 죽음을 알고 나서 파란색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빨간색과 주황색, 분홍색 등을 주로 사용했던 1904년부터를 '장미시대'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주제는 주로 서커스 공연자들이었습니다. 색채는 명랑한 듯 보이지만 여전히 청색시대의 우울함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브라크와 함께 서커스를 자주 보러 가며 자연스럽게 서커스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고 하네요. 이 시기에 몽마르트의 Bateau-Lavoir 건물에 파리 작업실을 처음으로 마련했고, 그의 최초의 뮤즈라고 기록되어 있는 프랑스 예술가이자 모델인 페르낭드 올리비에(Fernande Olivier)와 만난 시기이기도 합니다. 피카소는 올리비에를 그린 작품을 60여 점 남겼습니다.
1906년 그는 미국 소설가이자 시인, 극작가인 거트루드 스타인을 만나게 됩니다. 스타인은 아방가르드 아트 컬렉터이기도 하고, 피카소는 그의 초상화 작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작업에 많은 고민이 있던 피카소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본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초상화의 포즈를 차용해 오랜 고민 끝에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1907년 피카소는 최초의 입체파 그림으로 알려진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 그렸습니다. 브라크가 몽마르트의 작업실로 방문했고 두 예술가는 함께 큐비즘의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둘은 공동 작업에 전념했고 둘 중 한 명이 서명하지 않으면 완성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의 당시 작품이 누구의 작품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이유도 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1914년까지 피카소와 브라크는 차분한 갈색과 회색 위주의 분석적 입체파에 몰두했습니다. 이후 그들은 합성 큐비즘을 통해 더 밝은 색상을 도입하고 질감을 추가했으며 콜라주 작업도 추가했습니다.
2부 1920~1970년대
1921년 피카소는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변화의 시기를 겪었습니다. 큐비즘에서 벗어나 고전주의와 초현실주의에 몰두했습니다. 1917년 이탈리아를 여행한 후 신고전주의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그의 표현대로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기입니다. 마드리드 학생 시절부터 영향받은 거장들의 작품과 피렌체, 로마를 방문하며 본 바로크 시대의 거장들 그리고 르네상스의 예술가들 작품까지 작업에 흡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무용수인 올가 코클로바와 첫 결혼을 했고 피카소의 뮤즈이자 주제가 되었습니다. 코클로바와의 결혼으로 파리 최고 수준의 사교계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지만 참석하는 것을 싫어해 자주 논쟁을 벌였다고 합니다.
1927년 당시 45세였던 피카소는 17세 모델 마리 테레즈 월터와 결혼하게 외었습니다. 1935년에는 월터와의 관계가 끝났지만 코클로바와는 공식적으로 이혼하지 않았습니다. 월터는 여전히 피카소에게 엄청난 영감을 주었고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인 '거울 앞 소녀(Girl in Front of Mirror), 1932'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매끈하고 발랄한 모습과 대조적으로 거울 속의 어둡고 초라한 모습을 그린 이 작품에 대해 피카소는 MoMA의 창립 이사인 알프레드 바르에게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1932년 10월 피카소는 50세가 되었고 이듬해 열릴 Galerie Georges Petit에서의 회고전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전시회는 대성공이었습니다. 당시 피카소는 이미 멋진 파리지앵 아파트, 운전시가가 운전하는 자동차가 있고 노르망디의 다형 스튜디오를 가질 정도로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가 되었지만 정치와 예술을 혼합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습니다.
피카소의 또 다른 명작으로 불리는 게르니카는 1937년 작업되었습니다. 피카소는 1937년 파리 만국 박람회 참여를 위해 스페인 공화국 정부로 부터 대형 벽화를 의뢰 받았습니다. 작품의 오른쪽에는 불길이 치솟고 중앙에는 부러진 칼이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놓여있고, 군인을 짓 밝고 있는 말이 크게 그려져 있습니다. 왼쪽에는 죽은 아이와 그의 어머니가 있고 머리 위에는 유령 같은 모습의 황소가 있습니다. 피카소는 게르니카의 의미에 대해 논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학자들이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 작품을 해석했죠. 1938년과 1940년 사이 유럽과 미국을 순회했고, 이 작품을 스페인의 민주주의가 회복될 때까지 스페인으로 반환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MoMA에 보관하도록 맡겼다고 합니다. 이후 1975년 프랑코가 세상을 떠난 후 게르니카는 본국 송환이 진행됐고 현재 마드리드의 레이나 소피아 박물관에 소장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그는 전쟁에 대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그린 작품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도자기와 판화 작업을 주로 했습니다. 말년을 프랑스 남주 지역에서 작업했던 그는 사망한 날 새벽 3시까지 그림을 그렸던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1972년 그가 크레용으로 작업한 죽음에 직면한 자화상은 죽음에 가까워졌음을 그가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되게 하는 작품입니다. 끝까지 작업에 열정을 잃지 않고 끊임없는 연구와 시도를 거듭한 그의 업적은 어쩌면 새로움을 찾고 주저 없이 실행하는 그의 에너지에서 나온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기사 링크에서 더 많은 사진과 이야기를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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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롯 아트뉴스레터 #63(2023-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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