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nd]메가갤러리 시대의 끝? 페이스가 작가 50명을 내보낸 이유

Pace Gallery Chelsea


메가갤러리 시대의 끝? 페이스가 작가 50명을 내보낸 이유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갤러리 중 하나인 페이스(Pace)가 소속 작가와 직원을 한꺼번에 약 50명씩 줄인다고 밝혔습니다. 작가는 135명에서 85명 안팎으로 약 30%, 직원은 250명에서 200명으로 약 20% 줄어드는 대규모 축소예요. 그런데 더 눈길을 끈 건 숫자가 아니라 CEO가 직접 꺼낸 말이었습니다. "지금의 갤러리 모델은 망가졌을 뿐 아니라, 고칠 수조차 없다." 블루칩 메가갤러리의 수장이 스스로 자기 업계의 작동 방식을 부정한 셈인데요. 무슨 일이 있었고, 그래서 페이스는 어디로 가려는 걸까요.


Marc Glimcher: mega-gallery model is “unfixable”. Photo: Suzie Howell.


페이스는 정확히 무엇을, 얼마나 줄이나요?

이번 소식은 6월 3일 밤 뉴욕타임스가 처음 보도했고, 다음 날 페이스 CEO 마크 글림처(Marc Glimcher)가 공식 입장을 내며 확인됐습니다. 핵심은 소속 작가를 약 135명에서 85명 안팎으로, 직원을 약 250명에서 200명 선으로 줄인다는 것. 전 지점에 걸쳐 직원의 약 20%가 영향을 받습니다. 글림처는 변화가 곧 "전시도, 아트페어도 확실히 더 줄어든다는 뜻"이라며, "잘하려면 할 수 있는 데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어요. 다만 7개 지점(뉴욕·LA·런던·제네바·베를린·서울·도쿄)은 당분간 닫지 않고, 연 임대료가 약 800만 달러(약 110억 원)에 달하는 첼시 본사도 유지합니다. 흥미로운 건 발표 당일 오전, 페이스가 6월 16일 개막하는 아트바젤(Art Basel) 부스 라인업을 공개했다는 점이에요. 부스에는 칼더(Alexander Calder), 아그네스 마틴(Agnes Martin), 루이즈 니벨슨(Louise Nevelson) 등 오래된 페이스 작가들의 작품이 오릅니다.


왜 하필 지금, 그것도 페이스가?

배경에는 수년째 이어진 미술 시장 위축이 있습니다. 고금리, 트럼프발 무역 전쟁, 중동·우크라이나 분쟁 같은 불확실성 속에서 팬데믹 이후 중소 갤러리들은 줄줄이 문을 닫거나 몸집을 줄여왔는데, 정작 가고시안·하우저앤워스·즈위너와 함께 정점에 있는 페이스가 같은 말을 꺼냈다는 점이 충격을 줬어요. 글림처는 이번 결정이 단지 약해진 시장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비용이 오르면 가격이 오르고 다시 비용이 오르는" 자기강화적 악순환을 끊으려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운영비와 간접비에 철저하지 않으면, 그 구조가 당신을 그 소용돌이로 밀어넣는다"는 거죠. 창업자인 아버지 아르네 글림처(Arne Glimcher)는 더 직설적이었어요. "메가갤러리라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럽고 지속 불가능하다. 난 늘 그렇게 생각했다." 한편 잘린 작가 중 한 명인 글렌 카이노(Glenn Kaino)는 뉴욕타임스에 "그들의 모델은 끝내 오지 않은 미술계의 비전에 최적화돼 있었다는 게 한동안 분명했다"고 담담히 반응했습니다.


Mark Rothko fotografato nel suo studio nel 1961 (particolare)


그렇다면 페이스가 내놓은 '답'은 무엇인가요?

글림처는 이번 결정을 '축소'가 아니라 "모델 교정(model correction)"이라 불렀습니다. 단순히 덜어내는 게 아니라 다르게 일하겠다는 거예요. 방향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지역 밀착. 베를린·도쿄 지점을 뉴욕의 위성이 아니라 현지 관객과 컬렉터에 맞춘 독립적 프로그램으로 키우겠다는 것이고, 영감을 준 건 아버지 아르네가 운영하는 작은 프로젝트 공간 '125 Newbury'였다고 합니다. 둘째, 세대 간 연결. 젊은 작가들을 칼더·로스코(Mark Rothko)·아그네스 마틴 같은 갤러리의 거장 유산, 즉 그들의 "정신적 부모"와 이어주겠다는 구상이에요. 셋째, 협업 모델. 지난해 페이스가 딜러 에마누엘 디 도나, 데이비드 슈레더와 손잡고 만든 2차 시장 합작 'Pace Di Donna Schrader'가 이번 달 아트바젤에서 데뷔하는데, 글림처는 일찍이 "경쟁에 대한 집착이 우리를 저마진·고비용 군비경쟁으로 몰았다"며 "이 협업 모델이 미래"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전 크리스티 회장 유시 필카넨은 이를 "영리한 결정"이라 평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잘렸을까요? 매체가 직접 추적한 명단

페이스가 잘린 작가 명단을 공개하지 않자, 아트넷(Artnet)과 아트뉴스(ARTnews)는 각자 2026년 2월과 6월의 갤러리 웹사이트 작가 목록을 비교해 사라진 이름을 역추적했습니다. 그 결과 약 30명이 목록에서 빠진 것이 확인됐어요. 사진가 리처드 아베돈 유산, JR, 라파엘 로사노-에메르, 요제프 쿠델카, 키스 소니어 등이 포함됐습니다. 다만 두 매체의 명단이 완전히 일치하진 않았어요. 아트넷은 로버트 라우션버그를 빠진 명단에 넣었지만, 아트뉴스는 "페이스가 이미 수년 전부터 그 유산을 대리하지 않았다"며 정정 노트와 함께 명단에서 뺐습니다. 웹사이트에서 이름이 사라졌다고 모두 이번 감축 탓은 아니라는 거죠. 아트넷도 "일부는 이번 축소와 직접 관련 없을 수 있다"는 단서를 달았습니다. 그럼에도 빠진 이름들을 보면 한 가지 결이 눈에 띕니다. 사진 분야(아베돈·골드블랫·폴 그레이엄·쿠델카·로베르시 등)와 중국 작가(하이 보·홍 하오·류젠화 등)가 유독 많이 정리됐는데, 이는 페이스가 2022년 홍콩 지점을 닫은 흐름과도 맞닿아 보입니다.


Portrait of TIM BLUM, 2024. Photo by and courtesy Hannah Mjølsnes.


무너지고 있는 메가갤러리 모델

사실 페이스의 결정은 갑작스러운 사건이라기보다, 지난해부터 누적된 흐름의 한 정점에 가깝습니다. 2025년 한 해 동안 오래된 갤러리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는데, 그중엔 페이스와 일부 작가를 함께 다뤘던 블룸(Blum)도 있었어요. 블룸 역시 폐업하며 "지금의 갤러리 시스템"을 원인으로 지목했습니다. 구조적 압박은 명확합니다. 임대료·아트페어 참가비·인건비·운송비는 계속 오르는데, 시장은 식었거든요. 운송비가 작품 가격을 웃도는 경우까지 나올 정도라, 어드바이저 스테파니 암스트롱은 "지난 20년간 미술 시장을 지배한 '많을수록 좋다'는 사고가 바뀌기 시작했다"고 진단합니다. 옥션 풍경도 이 변화를 뒷받침해요. 최근 경매에서는 검증된 인상주의·모던 거장들의 작품에 돈이 몰리는 반면, 동시대·신진 작가의 거래는 빠르게 식었습니다. 페이스가 최근 콘스탄틴 브랑쿠시 유산을 영입한 것도, 안정적인 2차 시장을 가진 거장 쪽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가는 시장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즉 '크게, 더 많이'로 달려온 지난 10년의 확장 모델이 고비용 구조와 식어버린 수요 앞에서 한계를 드러낸 셈입니다.


앞으로의 갤러리는 어떤 모델일까

"더 적은 작가, 더 깊은 관계." 페이스가 내건 방향은 분명 매력적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이것이 진짜 철학적 전환인지, 아니면 재정적 압박을 우아하게 포장한 말인지는 더 지켜봐야겠죠. 한 가지 분명한 건, 미술 시장에서 '크다'는 것이 더 이상 곧 '강하다'를 뜻하지 않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규모를 키우는 것이 답이던 시대가 저물고 있다면, 우리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일하는 방식도, 그 작품을 만나는 방식도 달라질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갤러리가 '작아지는 것'을 위기로 보시나요, 아니면 건강한 조정으로 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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