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남준은 한국인인가 일본인인가 아니면 미국인인가
백남준이 세상을 떠난 지 20년입니다. 2006년 1월 29일 마이애미 자택에서였고, 유해는 서울과 뉴욕, 독일에 나뉘어 안치됐습니다. 세 곳에 나뉜 유해가 그의 삶을 요약합니다. 서울의 손꼽히는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그 집은 무너졌고, 유럽 미술계에서 그는 끝까지 동양에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20주기를 맞아 그의 시작과 분투, 그리고 지금 볼 수 있는 전시까지 정리했습니다.

*1935년 금강산 여행 가족 사진. 앞줄 왼쪽이 백남준, 뒤에 서 있는 사람이 아버지 백낙승, 출처: 백남준 아트센터
창신동 큰대문집의 막내아들
백남준은 1932년 7월 20일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창직물을 이끌던 백낙승과 어머니 조종희의 3남 2녀 중 막내였고, 종로구 창신동 197번지 큰대문집에서 열여덟 살까지 살았습니다. 99칸짜리 한옥이었고, 집에는 피아노와 전축은 물론 당시 서울에 두 대뿐이던 캐딜락이 있었습니다. 한국전쟁의 아비규환 속에서도 파인애플을 먹던 집이었죠. 그가 미술이 아니라 음악에서 출발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1952년 도쿄대 미학미술사학과에 입학해 1956년 졸업했고, 졸업 논문 주제는 쇤베르크였습니다. 이후 서독 뮌헨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대학에서 철학과 음악사학 석사를 마칩니다. 여기까지는 완벽한 엘리트 코스입니다.

어느 나라 사람도 아니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아버지 백낙승은 친일 행적으로 이후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백남준 본인도 집안이 친일파였음을 인정한 적이 있으며, 해방되던 날 온 동네가 환호할 때 자기 집은 문을 굳게 닫았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5·16 이후 일가는 부정축재자로 몰려 태창방직을 통째로 몰수당했고, 창씨개명 시절의 성씨 하쿠타를 그대로 쓴 채 미국에 정착했습니다. 형 백남일은 1962년 일본으로 귀화했고, 조카는 지금도 일본 국적입니다. 결국 백남준은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미국 국적의 작가로 남았습니다. 유럽에서 그의 별명은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이자 황색 재앙이었습니다. 비하하는 의미의 호칭이었지만 그는 1962년 "황색 재앙, 그건 바로 나다"라고 선언하며 그 말을 스스로 뒤집었습니다.

소머리에 가려진 TV 열세 대
1963년 3월, 그는 독일 유학 6년을 정리하는 첫 개인전을 부퍼탈 갤러리 파르나스에서 엽니다. 건축가 롤프 예를링의 집을 겸한 갤러리였고, 백남준은 1·2층과 지하실, 정원까지 통째로 썼습니다. 전시에는 실험 TV 열세 대와 함께 적분된 피아노, 랜덤 액세스 뮤직, 파괴된 누드 마네킹 같은 작업이 놓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갤러리 입구에 진짜 소머리를 걸었습니다. 개막 직전 보건법 위반으로 경찰에 철거당하며 소동이 벌어졌죠. 결과는 아이러니했습니다. TV 작업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백남준은 훗날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텔레비전은 기억하지 못하고 소머리에만 정신이 팔렸다고 한탄했습니다. 그 TV들은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아 회로를 연구하고, 전시장에서 수상기 앞에 몇 시간씩 앉아 원하는 화면이 나올 때까지 내부 회로를 고쳐가며 만든 것이었습니다.

20주기, 지금 볼 수 있는 전시
백남준아트센터가 제1회 백남준미디어아트페스티벌 《백남준의 행성》을 열고 있습니다. 2026년 7월 16일부터 2027년 2월 14일까지이며, 제1전시실의 《별, 괘卦》는 전 기간, 제2전시실의 《달들》은 10월 4일까지입니다. 별에서 행성, 위성, 미디어 네트워크로 이어지는 그의 행성적 상상력이 출발점이고, 1990년대 행성 작업을 중심으로 동양적 사유와 전자 매체를 통한 세계 인식을 함께 다룹니다. 1991년작 《버추얼 비너스로 향하는 우주선》이 국내에서 처음 공개됩니다. 추석 연휴인 9월 16일에는 이천거북놀이보존회와 함께 대형 비디오 설치 《거북》 앞에서 전통 민속놀이 거북놀이를 선보입니다.

왜 미술사가 그를 기억하는가
이전까지 미술은 회화 아니면 조각이었고, TV는 보는 물건이었지 다루는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백남준은 브라운관 내부 회로를 직접 건드려 화면을 일그러뜨렸습니다. 방송이 일방적으로 밀어 넣는 이미지를 관객이 되받아칠 수 있다는 것, 그게 비디오 아트의 출발점이었습니다. 1965년에는 세계 최초의 휴대용 비디오카메라 소니 포타팩으로 뉴욕을 방문 중이던 교황을 찍어 곧바로 카페 오 고고에서 상영했고, 이것이 미술사에서 비디오 아트의 공식적인 시작으로 기록됩니다. 1967년 첼리스트 샬럿 무어먼과의 공연으로 한동안 B급 예술가로 취급받았지만, 1982년 휘트니 미술관 회고전으로 평가가 뒤집혔습니다. 1993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 대표로 한스 하케와 함께 참가해 〈전자 초고속도로: 베니스에서 울란바토르까지〉를 선보이며 황금사자상을 받았습니다.

대표작 몇 점
〈TV를 위한 선(Zen for TV)〉(1963)은 화면을 한 줄의 빛으로 줄여버린 작업입니다. 정보를 쏟아내던 TV가 명상의 대상이 됩니다. 〈달은 가장 오래된 TV〉(1965)는 모니터 여러 대에 달의 위상 변화를 담아, 인류가 처음 올려다본 화면이 달이었다고 말합니다. 〈TV 부처〉(1974)는 부처상이 폐쇄회로 카메라에 찍힌 자기 모습을 마주보게 한 작업으로, 그의 동서양 감각이 가장 압축된 이미지입니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은 위성으로 뉴욕·파리·서울을 이은 생중계 쇼였습니다. 감시의 도구가 되리라던 매체로 전 지구적 축제를 만든 겁니다. 그리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 맞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 세운 〈다다익선〉이 있습니다. 1,003대의 브라운관 모니터를 쌓아 올린 높이 18.5m의 탑으로, 백남준의 작품 중 최대 규모입니다.

컬렉션에서 만나보기
그가 예견한 전자 초고속도로는 이제 인공지능과 가상현실이 일상이 된 초연결 사회가 됐습니다. 20년이 지나 그의 화면을 다시 보면, 기술을 찬양한 작가가 아니라 기술을 끝까지 의심하고 놀렸던 작가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됩니다. 좋아하는 작가의 이미지를 벽에 걸어두는 일은 그 시선을 매일 마주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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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s: 백남준아트센터(njp.ggcf.kr), MoMA
백남준은 한국인인가 일본인인가 아니면 미국인인가
백남준이 세상을 떠난 지 20년입니다. 2006년 1월 29일 마이애미 자택에서였고, 유해는 서울과 뉴욕, 독일에 나뉘어 안치됐습니다. 세 곳에 나뉜 유해가 그의 삶을 요약합니다. 서울의 손꼽히는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그 집은 무너졌고, 유럽 미술계에서 그는 끝까지 동양에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20주기를 맞아 그의 시작과 분투, 그리고 지금 볼 수 있는 전시까지 정리했습니다.
*1935년 금강산 여행 가족 사진. 앞줄 왼쪽이 백남준, 뒤에 서 있는 사람이 아버지 백낙승, 출처: 백남준 아트센터
창신동 큰대문집의 막내아들
백남준은 1932년 7월 20일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창직물을 이끌던 백낙승과 어머니 조종희의 3남 2녀 중 막내였고, 종로구 창신동 197번지 큰대문집에서 열여덟 살까지 살았습니다. 99칸짜리 한옥이었고, 집에는 피아노와 전축은 물론 당시 서울에 두 대뿐이던 캐딜락이 있었습니다. 한국전쟁의 아비규환 속에서도 파인애플을 먹던 집이었죠. 그가 미술이 아니라 음악에서 출발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1952년 도쿄대 미학미술사학과에 입학해 1956년 졸업했고, 졸업 논문 주제는 쇤베르크였습니다. 이후 서독 뮌헨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대학에서 철학과 음악사학 석사를 마칩니다. 여기까지는 완벽한 엘리트 코스입니다.
어느 나라 사람도 아니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아버지 백낙승은 친일 행적으로 이후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백남준 본인도 집안이 친일파였음을 인정한 적이 있으며, 해방되던 날 온 동네가 환호할 때 자기 집은 문을 굳게 닫았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5·16 이후 일가는 부정축재자로 몰려 태창방직을 통째로 몰수당했고, 창씨개명 시절의 성씨 하쿠타를 그대로 쓴 채 미국에 정착했습니다. 형 백남일은 1962년 일본으로 귀화했고, 조카는 지금도 일본 국적입니다. 결국 백남준은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미국 국적의 작가로 남았습니다. 유럽에서 그의 별명은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이자 황색 재앙이었습니다. 비하하는 의미의 호칭이었지만 그는 1962년 "황색 재앙, 그건 바로 나다"라고 선언하며 그 말을 스스로 뒤집었습니다.
소머리에 가려진 TV 열세 대
1963년 3월, 그는 독일 유학 6년을 정리하는 첫 개인전을 부퍼탈 갤러리 파르나스에서 엽니다. 건축가 롤프 예를링의 집을 겸한 갤러리였고, 백남준은 1·2층과 지하실, 정원까지 통째로 썼습니다. 전시에는 실험 TV 열세 대와 함께 적분된 피아노, 랜덤 액세스 뮤직, 파괴된 누드 마네킹 같은 작업이 놓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갤러리 입구에 진짜 소머리를 걸었습니다. 개막 직전 보건법 위반으로 경찰에 철거당하며 소동이 벌어졌죠. 결과는 아이러니했습니다. TV 작업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백남준은 훗날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텔레비전은 기억하지 못하고 소머리에만 정신이 팔렸다고 한탄했습니다. 그 TV들은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아 회로를 연구하고, 전시장에서 수상기 앞에 몇 시간씩 앉아 원하는 화면이 나올 때까지 내부 회로를 고쳐가며 만든 것이었습니다.
20주기, 지금 볼 수 있는 전시
백남준아트센터가 제1회 백남준미디어아트페스티벌 《백남준의 행성》을 열고 있습니다. 2026년 7월 16일부터 2027년 2월 14일까지이며, 제1전시실의 《별, 괘卦》는 전 기간, 제2전시실의 《달들》은 10월 4일까지입니다. 별에서 행성, 위성, 미디어 네트워크로 이어지는 그의 행성적 상상력이 출발점이고, 1990년대 행성 작업을 중심으로 동양적 사유와 전자 매체를 통한 세계 인식을 함께 다룹니다. 1991년작 《버추얼 비너스로 향하는 우주선》이 국내에서 처음 공개됩니다. 추석 연휴인 9월 16일에는 이천거북놀이보존회와 함께 대형 비디오 설치 《거북》 앞에서 전통 민속놀이 거북놀이를 선보입니다.
왜 미술사가 그를 기억하는가
이전까지 미술은 회화 아니면 조각이었고, TV는 보는 물건이었지 다루는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백남준은 브라운관 내부 회로를 직접 건드려 화면을 일그러뜨렸습니다. 방송이 일방적으로 밀어 넣는 이미지를 관객이 되받아칠 수 있다는 것, 그게 비디오 아트의 출발점이었습니다. 1965년에는 세계 최초의 휴대용 비디오카메라 소니 포타팩으로 뉴욕을 방문 중이던 교황을 찍어 곧바로 카페 오 고고에서 상영했고, 이것이 미술사에서 비디오 아트의 공식적인 시작으로 기록됩니다. 1967년 첼리스트 샬럿 무어먼과의 공연으로 한동안 B급 예술가로 취급받았지만, 1982년 휘트니 미술관 회고전으로 평가가 뒤집혔습니다. 1993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 대표로 한스 하케와 함께 참가해 〈전자 초고속도로: 베니스에서 울란바토르까지〉를 선보이며 황금사자상을 받았습니다.
대표작 몇 점
〈TV를 위한 선(Zen for TV)〉(1963)은 화면을 한 줄의 빛으로 줄여버린 작업입니다. 정보를 쏟아내던 TV가 명상의 대상이 됩니다. 〈달은 가장 오래된 TV〉(1965)는 모니터 여러 대에 달의 위상 변화를 담아, 인류가 처음 올려다본 화면이 달이었다고 말합니다. 〈TV 부처〉(1974)는 부처상이 폐쇄회로 카메라에 찍힌 자기 모습을 마주보게 한 작업으로, 그의 동서양 감각이 가장 압축된 이미지입니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은 위성으로 뉴욕·파리·서울을 이은 생중계 쇼였습니다. 감시의 도구가 되리라던 매체로 전 지구적 축제를 만든 겁니다. 그리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 맞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 세운 〈다다익선〉이 있습니다. 1,003대의 브라운관 모니터를 쌓아 올린 높이 18.5m의 탑으로, 백남준의 작품 중 최대 규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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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예견한 전자 초고속도로는 이제 인공지능과 가상현실이 일상이 된 초연결 사회가 됐습니다. 20년이 지나 그의 화면을 다시 보면, 기술을 찬양한 작가가 아니라 기술을 끝까지 의심하고 놀렸던 작가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됩니다. 좋아하는 작가의 이미지를 벽에 걸어두는 일은 그 시선을 매일 마주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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