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사마 야요이, 97세로 별세
8월 27일, 쿠사마 야요이(Yayoi Kusama) 재단이 부고를 냈습니다. 그런데 사망일은 그보다 13일 앞선 8월 14일이었습니다. 향년 97세, 사인은 다발성 장기부전. 세상을 떠난 곳은 도쿄의 한 병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병원은 그가 1977년부터 반세기 가까이 제 발로 걸어 들어가 살던 곳이기도 합니다. 물방울, 호박, 무한 거울방. 우리가 아는 쿠사마의 거의 모든 것은 그 병실에서 걸어 나온 결과물이었습니다.
부고는 왜 13일이나 늦게 나왔을까요?
재단은 27일 발표에서 쿠사마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붓을 놓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고 전했습니다. "사랑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평생의 믿음도 끝까지 지켰다고 했습니다. 장례는 이미 가족장으로 치러진 뒤였습니다. 1988년부터 일본에서 쿠사마를 대리해 온 오타 파인 아츠(Ota Fine Arts)의 오타 히데노리는 장례 참석자가 스무 명 남짓이었다고 전했습니다. 마쓰모토의 친척들과 재단, 갤러리 관계자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는 7월 말 중환자실에서 쿠사마를 마지막으로 만났고, 그때 이미 작업을 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지만 말을 걸면 반응했다고 회고했습니다. 공개 추모 자리는 이후 따로 마련될 예정입니다. 2013년부터 미국에서 쿠사마를 맡아 온 데이비드 즈위너(David Zwirner)는 부고에 맞춰 "의심할 여지 없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생존 작가였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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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베니스에서 제지당한 작가가 어떻게 관객 기록을 갈아치웠을까요?
1929년 나가노현 마쓰모토에서 태어난 쿠사마는 어릴 때부터 환영과 환청을 겪었고, 그때 본 그물과 점, 유기적 형태가 평생의 모티프가 됐습니다. 1957년 미국으로 건너가 이듬해 뉴욕에 자리 잡은 뒤 Infinity Net 연작과 소프트 조각, 거울과 빛을 쓴 설치로 아방가르드 진영에 이름을 올립니다. 1966년에는 초청도 받지 않은 채 베니스 비엔날레에 나타나 이탈리아관 앞에 은색 구 1,500개를 깔아놓은 Narcissus Garden을 설치했습니다. "당신의 나르시시즘을 팝니다"라고 적힌 팻말과 함께 개당 2달러에 팔았고, 주최 측이 결국 판매를 중단시켰습니다. 27년이 지난 1993년, 그는 일본 대표 작가로 정식 초청을 받아 같은 자리에 다시 섰습니다. 1973년 일본으로 영구 귀국한 뒤 1977년 도쿄의 정신병원에 자진 입원했고, 그곳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물방울은 그에게 무엇이었을까요?
말년의 생산량은 오히려 늘었습니다. 2009년 시작한 My Eternal Soul 연작은 2021년 마무리될 때까지 약 900점에 이르렀고, 이후에는 익숙한 모티프에 시와 문장을 얹은 Every Day I Pray for Love로 이어졌습니다. 관객 규모도 생존 작가로서는 보기 드문 수준이었습니다. 2024년부터 2025년까지 열린 멜버른 빅토리아 국립미술관 회고전은 57만 537명을 모아 미술관 역사상 최다 유료 관람 전시가 됐습니다. 지난해 스위스 바이엘러 재단에서 시작해 쾰른 루트비히 미술관으로 옮겨 간 70여 년 회고전도 48만 335명을 기록하며 그 미술관 개관 이래 가장 성공한 전시로 남았습니다. 이 순회전의 마지막 무대는 9월 11일 암스테르담 스테델릭 미술관에서 열립니다. 이제는 추모전이 되어버렸습니다. 오타는 쿠사마의 유산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여성이고, 일본인이자 아시아인이고, 정신적 어려움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사람. 오랫동안 불리하게 여겨지던 조건들을 그는 전부 강점으로 바꿔놨다고요. 물방울은 병의 증상이었을까요, 아니면 그것을 견디는 방법이었을까요.
참고 원문
The Art Newspaper / The Art Newspaper / Artforum
images: Artist Website
쿠사마 야요이, 97세로 별세
8월 27일, 쿠사마 야요이(Yayoi Kusama) 재단이 부고를 냈습니다. 그런데 사망일은 그보다 13일 앞선 8월 14일이었습니다. 향년 97세, 사인은 다발성 장기부전. 세상을 떠난 곳은 도쿄의 한 병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병원은 그가 1977년부터 반세기 가까이 제 발로 걸어 들어가 살던 곳이기도 합니다. 물방울, 호박, 무한 거울방. 우리가 아는 쿠사마의 거의 모든 것은 그 병실에서 걸어 나온 결과물이었습니다.
부고는 왜 13일이나 늦게 나왔을까요?
재단은 27일 발표에서 쿠사마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붓을 놓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고 전했습니다. "사랑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평생의 믿음도 끝까지 지켰다고 했습니다. 장례는 이미 가족장으로 치러진 뒤였습니다. 1988년부터 일본에서 쿠사마를 대리해 온 오타 파인 아츠(Ota Fine Arts)의 오타 히데노리는 장례 참석자가 스무 명 남짓이었다고 전했습니다. 마쓰모토의 친척들과 재단, 갤러리 관계자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는 7월 말 중환자실에서 쿠사마를 마지막으로 만났고, 그때 이미 작업을 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지만 말을 걸면 반응했다고 회고했습니다. 공개 추모 자리는 이후 따로 마련될 예정입니다. 2013년부터 미국에서 쿠사마를 맡아 온 데이비드 즈위너(David Zwirner)는 부고에 맞춰 "의심할 여지 없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생존 작가였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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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베니스에서 제지당한 작가가 어떻게 관객 기록을 갈아치웠을까요?
1929년 나가노현 마쓰모토에서 태어난 쿠사마는 어릴 때부터 환영과 환청을 겪었고, 그때 본 그물과 점, 유기적 형태가 평생의 모티프가 됐습니다. 1957년 미국으로 건너가 이듬해 뉴욕에 자리 잡은 뒤 Infinity Net 연작과 소프트 조각, 거울과 빛을 쓴 설치로 아방가르드 진영에 이름을 올립니다. 1966년에는 초청도 받지 않은 채 베니스 비엔날레에 나타나 이탈리아관 앞에 은색 구 1,500개를 깔아놓은 Narcissus Garden을 설치했습니다. "당신의 나르시시즘을 팝니다"라고 적힌 팻말과 함께 개당 2달러에 팔았고, 주최 측이 결국 판매를 중단시켰습니다. 27년이 지난 1993년, 그는 일본 대표 작가로 정식 초청을 받아 같은 자리에 다시 섰습니다. 1973년 일본으로 영구 귀국한 뒤 1977년 도쿄의 정신병원에 자진 입원했고, 그곳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물방울은 그에게 무엇이었을까요?
말년의 생산량은 오히려 늘었습니다. 2009년 시작한 My Eternal Soul 연작은 2021년 마무리될 때까지 약 900점에 이르렀고, 이후에는 익숙한 모티프에 시와 문장을 얹은 Every Day I Pray for Love로 이어졌습니다. 관객 규모도 생존 작가로서는 보기 드문 수준이었습니다. 2024년부터 2025년까지 열린 멜버른 빅토리아 국립미술관 회고전은 57만 537명을 모아 미술관 역사상 최다 유료 관람 전시가 됐습니다. 지난해 스위스 바이엘러 재단에서 시작해 쾰른 루트비히 미술관으로 옮겨 간 70여 년 회고전도 48만 335명을 기록하며 그 미술관 개관 이래 가장 성공한 전시로 남았습니다. 이 순회전의 마지막 무대는 9월 11일 암스테르담 스테델릭 미술관에서 열립니다. 이제는 추모전이 되어버렸습니다. 오타는 쿠사마의 유산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여성이고, 일본인이자 아시아인이고, 정신적 어려움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사람. 오랫동안 불리하게 여겨지던 조건들을 그는 전부 강점으로 바꿔놨다고요. 물방울은 병의 증상이었을까요, 아니면 그것을 견디는 방법이었을까요.
참고 원문
The Art Newspaper / The Art Newspaper / Artforum
images: Artist Website